베트남 커피 핀은 컵 위에 올려두는 작은 금속 드리퍼다. 하롱베이 바이짜이(Bãi Cháy)의 동네 카페에 앉으면, 주문한 커피는 완성된 채로 나오지 않는다. 연유가 깔린 유리잔 위에 이 핀이 얹혀 나오고, 손님은 그 안에서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. 하롱베이에서 10년째 살고 있지만, 처음 이 장면을 본 한국 손님들의 반응은 해마다 거의 같다.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는 연신 반복하며 “이거, 언제 다 내려와요?”
같은 거리 건너편에는 번쩍이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은 새 카페가 있다. 거기서는 버튼 한 번에 30초도 안 돼 커피가 나온다. 원두도 크게 다르지 않다. 둘 다 베트남 중부 고원에서 온 로부스타를 쓰는 경우가 많다. 그런데 한 모금 마셔 보면 두 잔은 전혀 다른 음료처럼 느껴진다.
커피 시리즈 8편인 이번 글에서는 이 차이를 파고든다. 베트남 사람들은 왜 아직도 느린 핀을 고집할까. 에스프레소 머신이 흔해진 지금도 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. 답은 추출 도구가 아니라, 그 도구에 들어가는 원두의 성격에 있다.

베트남 커피 핀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무엇이 다른가요?
가장 큰 차이는 압력과 시간이다. 핀은 압력 없이 중력만으로 뜨거운 물을 원두 사이로 천천히 통과시켜 5~6분에 걸쳐 커피를 내린다. 에스프레소 머신은 약 9기압의 압력으로 물을 밀어 넣어 25초 안팎에 추출을 끝낸다. 같은 원두라도 이 차이 때문에 맛의 무게와 질감이 완전히 달라진다.
핀의 구조는 단순하다.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컵 모양 몸통, 원두를 눌러주는 얇은 누름판, 그리고 뚜껑. 베트남어로는 그냥 핀(phin), 혹은 핀 까페(phin cà phê)라고 부른다. 종이 필터도, 전기도 필요 없다. 미국 커피 로스터리 코아바(Coava Coffee)가 소개하는 표준 레시피는 원두 16g에 물 100g, 먼저 30g을 부어 45초 뜸을 들인 뒤 나머지를 붓고 총 5~6분을 기다리는 방식이다.
에스프레소는 기준이 훨씬 엄격하다.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국립연구소(Istituto Nazionale Espresso Italiano)가 정한 인증 에스프레소 기준은 원두 7±0.5g, 추출 압력 9±1기압, 추출 시간 25±5초, 추출 물 온도 88±2℃다. 1947년 가지아(Gaggia)가 레버식 피스톤 기계를 발전시키고 이듬해 판매를 시작하면서, 이 짧고 강한 추출이 현대 에스프레소의 표준이 되었다.
정리하면 에스프레소는 “짧게, 세게”, 핀은 “길게, 조용히”다. 한쪽은 압력으로 원두 속 기름과 향을 순간적으로 뽑아내 크레마를 만들고, 다른 쪽은 시간을 들여 원두가 가진 쓴맛과 바디를 끝까지 우려낸다. 핀으로 내린 커피에는 크레마가 많지 않다. 대신 잔 바닥까지 묵직하게 가라앉는 진한 액체가 남는다.
왜 베트남은 로부스타를 핀으로 내릴까요?
베트남 커피의 대부분이 로부스타이고, 로부스타는 쓴맛과 바디가 강한 원두이기 때문이다. 베트남 커피 생산량의 약 95%가 로부스타다. 이 원두를 핀으로 천천히 내리면 짙고 쓴 원액이 나오고, 여기에 연유와 얼음을 더하면 쓴맛이 단맛과 균형을 이루는 베트남식 커피가 완성된다.
베트남은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 커피 생산국이다. 베트남 국영 방송 VOV는 2025/26년 수확기 베트남 커피 생산량을 3,080만 포대로 전망하면서, 그중 약 95%가 여전히 로부스타일 것이라고 보도했다(VOV 보도 원문). 베트남 사람들이 로부스타를 까페 보이(cà phê vối), 아라비카를 까페 째(cà phê chè)라고 부르며 구분하는 것도 그만큼 두 원두의 존재감이 다르기 때문이다.
로부스타의 성격은 숫자로도 드러난다. 커피 로스터리 시몬 앤 베른스(Simon & Bearns)의 정리에 따르면 아라비카의 카페인 함량은 대체로 1.2% 안팎, 로부스타는 2.2% 안팎으로 로부스타가 약 1.5~2배 높다. 쓴맛과 관련된 클로로겐산도 마찬가지다. 2019년 식품 학술지 「Food Research International」에 실린 연구는 생두 건조 중량 기준으로 로부스타의 클로로겐산이 약 7.0~14.4%, 아라비카가 약 4.0~8.4%라고 보고했다.
이런 원두를 에스프레소처럼 짧게 뽑으면 쓴맛이 날카롭게 튀기 쉽다. 반대로 핀에서 오래 우려내면 쓴맛이 둥글고 묵직한 바디로 바뀌고, 연유가 그 위를 덮는다. 베트남 사람들이 로부스타를 버리지 않고 핀을 고집해 온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본다. 도구가 원두에 맞춰 진화한 것이다.

아라비카라면 핀과 에스프레소 중 무엇이 나을까요?
산미와 향을 살리고 싶다면 에스프레소나 짧은 핸드드립이 더 잘 맞는다. 아라비카는 로부스타보다 카페인과 쓴맛이 적고 과일 같은 산미가 강한 원두다. 핀으로 5분 넘게 우려내면 이 섬세한 향이 묻히고 밋밋해질 수 있다. 다만 핀용으로 굵게 갈고 물 양을 조절하면 아라비카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다.
하노이나 하롱베이의 새 카페들을 보면 흥미로운 흐름이 있다.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가게일수록 메뉴판에 “아라비카 블렌드”를 따로 적어 두는 경우가 많고, 전통 핀을 쓰는 가게는 여전히 로부스타 위주다. 원두와 도구가 짝을 이룬다는 걸 가게 주인들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. 물론 이것은 내가 다니는 동네 카페들을 보며 느낀 경향이지, 통계로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.
손님들과 카페를 돌며 두 잔을 나란히 시켜 본 적이 여러 번 있다. 로부스타 핀 커피를 먼저 마시면 에스프레소가 가볍게 느껴지고, 반대로 산뜻한 아라비카 에스프레소를 먼저 마시면 핀 커피가 한약처럼 진하다는 반응이 나온다. 어느 쪽이 더 낫다기보다, 원두의 성격과 추출 방식이 맞아떨어질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이 10년 동안 두 잔을 번갈아 마시며 얻은 결론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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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행 중 베트남 커피 핀을 제대로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?
핀이 얹혀 나오면 서두르지 말고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, 연유와 잘 저어 마시면 된다. 메뉴에서 까페 핀(cà phê phin) 또는 까페 쓰어(cà phê sữa)를 고르면 핀째로 나오는 가게가 많다. 뚜껑을 받침 삼아 핀을 내려놓고, 뜨거운 커피가 모두 떨어진 뒤 얼음을 넣는 것이 현지식이다. 아쉽지만 요즘에는 가게을 오픈하기 전에, 아니면 더 미리 커다란 핀으로 추출을 해 놓고 손님이 오면 따라 주는 방식이 많아지고 있다.
처음 온 손님들은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꺼낸다. 그런데 몇 번 핀 커피를 마셔 본 손님들은 달라진다. 핀 속을 들여다보며 떨어지는 속도로 물이 잘 빠지는지 가늠하고, 거리의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, 옆 테이블 할아버지들이 해바라기씨를 까는 모습을 본다. 단지 5분이지만, 이 5분은 생각에 따라 다른 시간이 된다.
연유를 넣은 따뜻한 커피와 얼음을 넣은 커피가 어떻게 다른지는 앞선 편인 카페 쓰어다와 카페 노우다 비교 글에 자세히 적어 두었다. 핀을 기념품으로 사 가고 싶다면, 원두는 핀용으로 굵게 간 로부스타 블렌드를 함께 고르는 편이 실패가 적다.

베트남 커피 핀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
핀 커피는 에스프레소보다 카페인이 많나요?
도구보다 원두 영향이 더 크다. 베트남 핀 커피는 대부분 로부스타를 쓰는데, 로부스타의 카페인 함량이 아라비카의 약 1.5~2배라 같은 양이라면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.
핀에서 커피가 너무 빨리, 혹은 안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요?
너무 빨리 떨어지면 원두를 더 곱게 갈거나 누름판을 조금 더 눌러 주고, 거의 안 떨어지면 반대로 더 굵게 갈거나 누름판을 느슨하게 하면 된다.
한국에서도 베트남 커피 핀으로 내릴 수 있나요?
가능하다. 핀은 전기나 종이 필터가 필요 없어 뜨거운 물만 있으면 된다. 원두 16g에 물 100g, 5~6분 정도를 기준으로 시작해 취향에 맞게 조절해 보자.
5분의 기다림이 알려주는 것
베트남 커피 핀과 에스프레소 머신의 차이는 결국 속도의 차이가 아니라 원두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다. 강하고 쓴 로부스타는 시간을 들여 달래야 제맛을 내고, 섬세한 아라비카는 짧고 정확하게 붙잡아야 향이 산다. 베트남 사람들이 느린 핀을 버리지 않은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, 자기 땅에서 나는 원두를 가장 잘 아는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. 베트남 커피 전체의 종류가 궁금하다면 베트남 커피 종류 8가지 총정리를 먼저 읽어 보길 권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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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롱베이에 거주하며 투어가이드·여행사 운영·현지 투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. 개인 투어 상담 및 여행 문의는 상단 메뉴의 ‘투어 문의’를 이용해 주세요.
