접시가 깨졌습니다. 식당 종업원이 쟁반을 옮기다 좀 떨어진 제 발치에서 접시 하나를 떨어뜨렸는데, 그 사람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. “죄송합니다”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. 하롱베이에서 10년을 살아온 지금은 이런 장면이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, 처음 몇 년은 이 침묵이 꽤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. 한국과 베트남 문화 차이를 몸으로 배운 첫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.

베트남 사람은 왜 잘못을 해도 먼저 사과하지 않나요?
사과를 안 하는 게 아니라, 사과의 무게를 다르게 두기 때문입니다. 베트남 사회에서 “미안하다”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는 동시에 상대 앞에서 자신의 체면(thể diện)을 내려놓는 행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. 그래서 말로 인정하는 대신, 조용히 행동으로 수습하거나 다음번에 더 잘해주는 방식으로 갚으려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.
한국에서는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자체가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배웁니다.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그 첫걸음의 방향이 다릅니다. 말보다 행동, 인정보다 관계 유지가 먼저 오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된 건 접시가 깨진 그날로부터도 한참 뒤였습니다.
비슷한 장면은 도로 위에서도 자주 벌어집니다. 오토바이끼리 가볍게 부딪히는 접촉 사고가 나도,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며 잘잘못을 가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. 대신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을 정리해 주고, 당사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옅게 웃고는 각자 갈 길을 갑니다. 한국이었다면 블랙박스 영상부터 확인하며 과실 비율을 따졌을 상황이, 여기서는 “누구 잘못인지”보다 “이 자리를 어떻게 조용히 넘기는지”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.
체면(thể diện)이라는 개념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나요?
체면은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고 있는 사회적 존엄과 신뢰의 총량입니다. 베트남에서는 이 체면이 본인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,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관계망 전체의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. 그래서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그 관계망 전체의 체면을 흔드는 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.

이 개념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베트남의 역사를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.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기원후 938년까지, 약 1,000년에 이르는 기간을 중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(북속기, 北屬期). 이후에도 1858년 프랑스의 다낭 공격을 시작으로 1954년 제네바 협정까지 약 96년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겪었습니다. 오랜 시간 외부 권력 아래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공동체는, 개인의 주장보다 집단의 결속과 체면을 지키는 쪽으로 생존 방식을 다듬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.
이 체면 개념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. 베트남 사람들이 관계를 맺을 때 자주 쓰는 표현으로 “꽌헤(quan hệ)”라는 말이 있는데, 이는 단순한 인맥이 아니라 서로 신뢰와 호의를 주고받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가는 관계망 전체를 뜻합니다. 한 사람의 실수를 그 자리에서 지적하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체면뿐 아니라, 그가 속한 꽌헤 전체의 신뢰까지 흔드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. 그래서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관계를 지키는 쪽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, 이들에게는 감정을 숨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성숙한 대응으로 여겨지는 셈입니다.
그렇다면 베트남 사람은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하나요?
베트남 사람들은 미안함을 말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. 다음에 밥값을 먼저 내거나, 평소보다 더 챙겨주거나, 아무 말 없이 더 신경 써서 도와주는 방식입니다. 겉으로는 사과가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만, 실제로는 “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겠다”는 더 긴 호흡의 사과인 셈입니다.
베트남 속담 중에 “Một điều nhịn, chín điều lành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. “한 번 참으면 아홉 번의 평온이 온다”는 뜻으로, 갈등의 순간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관계를 지키는 쪽을 택하라는 가르침입니다. 이 속담을 알고 나서야, 그날 접시를 깬 종업원이 말없이 조각을 치우던 모습이 무례함이 아니라 그 나름의 수습 방식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.
베트남은 54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기도 합니다. 이렇게 다양한 배경이 한 사회 안에 공존해 온 만큼, 갈등을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에둘러 풀어가는 방식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실용적인 지혜로 자리 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겁니다.
이 차이를 알면 여행이나 생활에서 무엇이 달라지나요?
베트남에서 누군가 사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을 모르는 것도, 무례한 것도 아니라는 걸 먼저 기억하면 좋습니다. 오히려 그 순간 침묵을 지키는 것 자체가 상황을 더 키우지 않으려는 배려일 수 있습니다. 여행 중 작은 실수나 오해가 생겼을 때, 상대의 사과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웃으며 넘어가 주는 쪽이 관계를 훨씬 편하게 만듭니다.
10년을 살아보니, 이건 어느 쪽이 더 낫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. 사과를 말로 하는 문화와 행동으로 하는 문화가 있을 뿐입니다. 그 차이를 알고 나면, 베트남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순간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. 다음 편에서는 이 관계 중심 사고방식이 베트남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약속 문화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짧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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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롱베이에 거주하며 투어가이드·여행사 운영·현지 투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. 개인 투어 상담 및 여행 문의는 상단 메뉴의 ‘투어 문의’를 이용해 주세요.
